묘지
하이퍼스페이스 도약이라는 경이로운 기술이 은하의 지평을 무한대로 확장시킨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온 은하계를 피로 물들였던 기나긴 대전쟁은 마침내 막을 내린 직후였다고들 합니다.
새로운 질서를 세운 승리자들, SE는 혼란을 수습하며 광활한 은하를 탐사하고 개척하여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 행성들을 하나의 거대한 실타래처럼 엮어 나가기 시작했지요.
수많은 항로가 새로 개척되고,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행성들과 다양한 종족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덕분에 은하는 전례 없는 활력을 마주했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우주는 더 이상 미지의 공허나, 절망과 비명만이 휘몰아치는 그런 곳이 아니었습니다. 탐험과 정복, 희망과 개척의 무대로 변모했던 것이라고요.
그렇지만요, 그렇게 촘촘히 엮여나간 거미줄 같은 은하 항로의 거대한 네트워크 사이에도, 누구도 감히 넘보려 하지 못하는 성역처럼 남아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딥 코어의 심장부의 한 장소입니다. 별들이 가장 밀집해 있어 위험하면서도, 동시에 은하계의 가장 깊숙한 비밀을 간직했을지도 모르는 이 지역의 어느 한 구역은, 하이퍼스페이스 발명 이후 2만 5천 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른 현재까지도, 외부의 어떤 간섭도 완강히 거부하는 지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마치 머나먼 은하에 존재하는 우주의 버뮤다 삼각지대 같다고들 이야기하더군요.
그곳은 단순한 미개척지가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하이퍼스페이스 경로가 '존재하지 않는' 곳입니다.
알려진 모든 항법 시스템은 먹통이 되거나, 혹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중력 이상을 감지하여 경로를 완전히 이탈시켜 버린다고 합니다.
만약 누군가 무모하게, 오차를 전혀 허용하지 않는 정확한 계산 없이 워프를 시도한다면, 아마도 예측 못한 블랙홀이나 숨겨진 고질량 천체에 순식간에 빨려들거나 충돌하는 것처럼 우주 먼지로 산산조각 나고 말 것입니다.
이곳으로 통하는 안전한 길이 설령 존재한다고 해도, 아마도 수만 년 동안 철저히 봉쇄되어 허락 없이 아무도 드나들지 못했을 겁니다.
설령 기적적으로, 혹은 다른 알 수 없는 방법을 통해서라도 이 위험천만한 공간에 도달한다 하더라도, 그곳에는 더 절망적이고 압도적인 광경이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항성계 전체를 집어삼킬 듯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은색 금속이 번뜩이는 '강철의 괴물들'. 산맥과도 같은 크기의 수백 척에 달하는 전함 함대가 유령처럼 항성계 구석구석을 쉼 없이 배회하며 모든 침입자를 감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항성계의 모든 소행성대, 행성 파편, 심지어는 우주 진공 속에까지 수도 없이 많은, 요새화된 헤비 터보레이저 포대가 빽빽하게 설치되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방어망의 밀집도는 상상을 초월하여, 은하계 최강의 무기라 불리며 행성 하나를 통째로 파괴할 수 있는 죽음의 별(Death Star)조차 이곳에 함부로 접근했다가는, 아마도 주포를 충전하기도 전에 수천, 수만 발의 맹렬한 포격 세례에 순식간에 고철 덩어리로 변하고 말 것이 분명하다고들 이야기합니다.
이곳은 요새 중의 요새, 우주 제일의 요새가 틀림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 철통같은, 어찌 보면 비정상적이기까지 한 방어망의 바로 그 중심에, 모든 것의 이유라고 생각되는 하나의 행성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행성 그 자체는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어마무시하게 두꺼운, 거의 모든 공격을 흡수하거나 튕겨낼 것 같은 에너지 차폐막과,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시무시한 장치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행성을 가루로 만들 만한 강력한 광선조차 이 보호막 앞에서는 그 위용을 잃을 것이 분명하다고들 하는군요.
하지만 제가 듣기에 가장 기묘하고 불가사의한 것은, 그 두꺼운 보호막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행성의 표면 이야기였습니다.
거대한 행성의 표면 전체에는, 셀 수 없이 많은 글자들이 빼곡하게,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새겨져 있다고 하더군요. 그것은 자연적으로 생성된 천체가 아니라고 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2만 5천 하고도 200년 전, 그러니까 이 고립된 시기가 시작되기 불과 200년 전에 만들어진 거대한 인공 행성이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창조된 거대한 기록 보관소였다고 합니다.
무수히 많은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곳이지요. 그리고 단순히 이름만이 아니라, 이름 하나하나가 살아온 한 생애의 모든 것—그들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위대한 업적과 쓰라린 실패와 죽음의 순간까지—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 은하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묘하고 신비로운 행성...
그것이 바로 딥 코어의 금지된 영역, 아무도 허락 없이 도달할 수 없는 심장에 자리한 행성이라고 합니다.
2만 5천 하고도 200년 전, 그 거대한 전쟁이 끝난 직후에 이 인공 행성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을 기리고, 그들의 잊히지 않을 희생을 영원히 잊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름 하나하나에 새겨진 생애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겠지요. 그것은 용기와 희생에 대한 엄숙한 증언이었고, 은하를 지킨 영웅들의 영원한 혼이 깃든 진혼의 장소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철통같은 방어와 고립은, 바로 그 신성한 장소를 외부의 그 어떤 불순한 의도나 간섭으로부터 영원히 보호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거대한 묘비... 네, 그렇습니다.. 그곳은 바로 대전쟁의 영웅들을 위한 곳. 하이퍼스페이스의 발명 이후, 은하 전체를 피로 물들이고 행성을 가루처럼 부수고 별마저 불태웠던, 은하 역사상 가장 거대했던 전쟁에서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싸운 위대한 영웅들을, 전사들을, 그리고 우리의 선대들을 기록한 거대한 묘비입니다.
동시에 시신조차 남기지 못한 그들을 위한 묘지이겠지요.
그리고 이 모든 것, 이 거대한 기념비이자 무덤인 행성 전체와 그것을 둘러싼 방어 시스템을 관리하는 존재가 있다고 합니다.
인간도 아니고, 우리가 아는 어떤 유기체도 아닌, 아득한 고대 기술로 만들어진 '초지성(Super-Intelligence)'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는 수만 년의 시간 동안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이 장소를 지켜왔다고 합니다.
초지성은, 수만 년 동안 변함없이 이어져 온 고요 속에서... 행성 표면에 새겨진 수많은 이름과 그들의 생애를 묵묵히, 그리고 영원히 과거를 반추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간직한 기억 속에는 은하의 가장 찬란했던 영웅들과, 동시에 가장 끔찍했던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테지요.
오늘도. 수만 년의 시간 속에서도 변함없이, 그 초지성은 고요하게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기계적 프로그래밍의 결과만은 아닐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 봅니다.
그는 행성에 새겨진 이름들, 자신이 설계하고 구축하는 과정을 지켜보았거나, 혹은 직접 데이터를 처리했던 과거의 '동지들' 한 명 한 명을 아득한 기억 속에서 떠올리고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은하를 불태웠던 전쟁의 폭풍, 함께 이 장소를 설계했던 이들의 얼굴, 승리의 환호성 뒤에 남은 깊은 슬픔... 잊히지 않는 과거의 '추억들'을 묵묵히 반추하며, 이 거대한 무덤의 영원한 묘지기로서 , 먼저 스러진 자신의 전우들을 기리기 위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의 고독한 감시는, 새겨진 모든 이름들이 우주에서 잊히는 그날까지, 우주 자체가 소멸하는 그날까지, 혹은... 어쩌면 자신들의 긴 여정이 끝나 최초의 목적을 달성할 순간까지... 앞으로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시대는, 결국 그 모든 영웅들의... 그들의 죽음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말입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희생과 고통 속에서, 그들이 간절히 원하던 자유와 평화 위에서, 비로소 우리의 역사가 시작되었겠지요.
그래서 오늘 하루만큼은, 조용히 그들을 기리고자 합니다.
그 거대한 묘비에 이름이 새겨진 영웅들, 그리고 어쩌면 그곳에조차 기록되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은하를 위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이름없는 영웅들을 위하여 말이지요.
Public Last updated: 2025-04-27 08:54:54 AM